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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이완용을 키우는 한국 사회
 
이완용 평전

원제 :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

김윤희 저 | 한겨레출판

출판일 : 2011.05.20 | 페이지 : 316 쪽

ISBN-13 : 9788984314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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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 인문 / 역사전기 주간 인기 OPB 순위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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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희 - 근대에 관심이 많은 저자


저자는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받은 후 현재 경원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면서 국가주권과 인민의 관계를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 밖의 저서로는 『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7』, 『영화처럼 읽는 한국사』, 『조선의 최후』, 『통계로 본 근현대사』 등이 있다.


반역사적 사상의 정의


저자는 이완용을 단순히 매국노가 아닌 도구적 합리성에 충실한 합리적 근대인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완용은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왕과 국가, 개인과 민족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빚어질 때 이완용이 선택한 것은 어느 한쪽도 아니었다. 균열을 직시하고 그것을 파열시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용기를 내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미래로 밀어내고 왕과 개인이 살아갈 현실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완용을 단순히 매국노가 아닌 도구적 합리성에 충실한 합리적 근대인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완용의 재평가를 통해 우리의 모습 반성하기


저자는 근대 역사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에게 합리적 근대인으로서 이완용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동안 매국노 이완용은 국가 또는 민족 구성원이란 소속감을 지탱시켜주는 배제된 타자였다. 그래서 저자는 근대 역사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에게 합리적 근대인으로서 이완용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는 독자가 합리적 근대인으로서 이완용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현실의 부조리에 분노하기 원한다.

이완용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는 현실의 삶이 갑자기 무겁게 다가왔을 때 분노와 열정의 피로감을 덜기 위해 안정을 원했다. 따라서 저자는 독자가 합리적 근대인으로서 이완용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현실의 부조리에 분노하기 원한다.



분노해야 할 현실이 없었던 이완용은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 어떤 사회적 가치의 부름에도 호응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완용은 어린 시절 반가의 양자로 들어가 고전을 익히고 스물 다섯에 과거에 급제했다. 이후 근대적 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에 입학해 영어를 배웠으며, 조선의 첫 번째 주미 참찬관으로 미국을 경험한다. 이후 이완용은 러시아, 미국을 배후로 삼는 정동파의 수장으로 부상, 아관파천을 감행하고 독립협회 창립에 개입해 초대 위원장을 지낸다. 1898년 만민공동회의 배후에도 이완용이 있었다. 이처럼 그는 복잡다단했던 구한말 정계에서 주목받는 기민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현실을 조망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완용은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왕과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1. 이완용의 초년


이완용은 명문가의 양자로 들어가 순탄하게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조선 정계에는 그의 생각을 실현할 만한 한 치의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관직을 그만두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완용은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우봉 이씨의 22대손인 이호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10살 되던 해인 1867년 4월 20일,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호준은 19세기 말 조선 정계의 복잡한 인맥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인물이었다. 세도정권의 막후였던 조대비 세력, 고정의 등극과 함께 막후가 된 대원군, 그리고 임오군란 이후 막후였던 중전 민씨 세력과 언제든 소통 가능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론 명문가에 양자로 들어간 이완용은 그 집안의 상속자로 교육받았고 다른 명문가 자제들과의 인맥을 형성하면서 관료로 진출하는 길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완용이 첫 관직인 규장각 시교로 등용된 것은 문과 급제 4년 후인 1886년 3월 24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곧 홍문관 수찬이 되었고 홍문관 수찬이 된 지 한 달도 안 되어 경학원 동학교수를 겸직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연이어 우영 군사마, 의정부 검상, 해방영 군사마 등을 겸직했다. 이처럼 이완용이 왕실 세력의 영향력이 강했던 우영과 해방영의 무관직을 겸했다는 점으로 볼 때 그는 와실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88년 말 이완용은 주미대리공사를 지내면서 조선의 정치체제를 크게 바꾸지 않은 채 미국과 같은 부강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완용이 미국에서 돌아와서 목도한 조선 정계에는 그의 생각을 실현할 만한 한 치의 여지도 없었다. 고종이 추진하던 개혁은 청의 간섭으로 거의 수포로 돌아갔고, 국가의 실권을 가진 내무부는 친청파 민씨 척족이 장악한 채 부정붚채가 만연되어 있었다. 변화의 새로운 기운이 없는 정계에서 이완용이 자신의 입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분란이 생길 수 있는 관직을 마다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2. 이완용의 중년


이완용은 갑오개혁 이후 점차 경륜 있는 정치인이 되어갔지만 기존의 권력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규정하는 관료로서의 태도를 견지한 개량적 개혁을 추진하는 정치 관료였다.

이완용은 갑오개혁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할 기회를 보았고 갑오내각에 참여할 것을 결정했다. 이완용은 자신이 주도한 내각에 닥친 정치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친일 세력과의 연합을 구상하는 등 치밀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 김가진 등 자파 세력을 활용할 줄 아는 정치 세력의 수장으로서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기 이완용에게는 정치 세력의 수장이란 역할과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제 그는 왕의 신임과 신하의 충성심으로 정치적 행보를 결정하는 젊은 관료의 모습을 완전히 탈피한다. 정동파의 수장으로서 자파 세력의 유지와 확대를 위해 활용 가능한 세력과 연대를 모색할 줄 아는 정치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점차 정치적 갈등 속에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체득한 경륜 있는 정치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1894년과 1895년이 이완용이 보여준 고종에 대한 충성심과 여전히 고종의 부름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찾으려는 그의 행동은 기존의 권력 구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위치 지우려는 것이었다. 갑오개혁 시기에 그가 추진한 행정제도와 교육제도의 개혁은 기존 체제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전라북도 관찰사로서 보여준 관료적 합리성 역시 기존 지방 행정 체제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이었다. 이완용은 갑오, 을미 개혁을 거치면서 그리고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기존의 권력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규정하는 관료로서의 태도를 벗어버린 적은 없었다. 그는 개량적 개혁을 추진하는 정치 관료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관료에 비해 신중한 성품의 인물로 유교적 합리성을 교육받았고 근대적 합리성을 체득한 인물이었다. 그는 체제에 편입된 양반 관료로서 자신의 지위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정세의 흐름과 상황에 맞춰 행동반경을 결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3. 이완용의 말년


이완용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철저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적인 사고로 친일행위를 했으며 이로 인해 매국의 표상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이완용이 매국 행위의 정점에 자리하게 된 배후에는 철저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적인 인생철학이 있었다. 그는 유교 교육을 통해 의리와 명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과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는 매우 실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 체결 때 대세를 어찌할 수 없다는 발언을 했던 점 등을 미루어볼 때 그는 역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 현실 가운데서 모든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최대한 또는 최소한 얻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실용주의적 면모를 갖고 있었다. 을사조약을 맺을 것이라면 수정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해야 하고,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할 것이라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주권이 없더라도 황실과 대한제국민이 편안하다면 그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보았다. 명분, 대의, 정의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근대 실용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한일병합 이후 매국이라는 명명이 붙으면 조선인에게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매국의 표상이었던 이완용의 죽음은 숙연해지는 인간의 죽음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저주와 조롱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매국노란 개념에 내포된 인간성의 상실 때문이었다. 이러한 저주는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이 현실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식민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출구이기도 했다.



제2의 이완용을 키우는 한국 사회


대한민국의 미래는 이완용을 욕하면서도 이완용처럼 살 준비가 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암울할 뿐이다.

일제 강점기 공중변소들에는 흔히 ‘이박식당’(李朴食堂)이라는 낙서가 씌어 있었다고 한다. ‘이완용과 박제순이 밥 먹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똥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완용 자신은 자기가 시세의 흐름을 잘 살펴 처신한 덕에 계속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그가 한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사실 그는 그 험악한 정변의 시대를 귀양살이 한 번 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이재명의 칼에 맞은 자리가 쑤시고 아플 때마다, 자신이 동포들의 저주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략... 서울신문 2012. 09. 17)

이완용의 매국 행위는 언뜻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주권 문제를 현실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영혼 없는 관료일 뿐이다.

『이완용 평전』은 이완용의 죄는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할 줄 몰랐던 데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 책은 합리와 실용을 최고로 치던 이완용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 이처럼 『이완용 평전』은 현실과 실용을 앞세우는 오늘날 도덕과 명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책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청년들에게 스펙을 쌓아라, 인맥을 다져라, 시세의 흐름을 살펴라, 기회를 놓치지 마라 등 이완용처럼 살라고 가르친다. 우리 사회에서 지조를 지켜라, 기개를 길러라 등의 말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누구나 이완용을 욕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완용을 본받으려 하고 있다. 이렇게 이완용처럼 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나와 국가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철학을 잊어버릴 때, 성실함과 합리적인 생각은 사악함으로 바뀌어 버린다. - 안광복 -
Written By 김선형
- 회의는 비판적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의의를 가진다.



전체 2


지나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가 어떤 결말로 치닫는지... 모노아루 0
이완용은 친일매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만민공동회의 지원자로도 활동하고, 독립운동의 사전징후를 포착해도 묵인하는등, 의외인 면이 있는 인물이다. 또한 고종에 대한 충성심도 보이면서 결국 고종의 몰락에 일조를 하는등, 그의 일생은 이중적인 모습으로 점철되있다.
한국사에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살았고, 외부에 대한 대처가 안되어있는 구 한말의 실태를 보며 고위관료인 이완용은 자신의 생각과 미래를 실용주의와 현실주의에 맡겼다. 개인적으로는 평생의 영달을 가져다주니 옳은 선택이었겠지만, 절대로 실용적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민족과 국가의 문제를 처리했다는 점에서 그는 앞으로도 역사의 냉정한 평가를 받아야만 할 것이다.
한 지식인의 추락 dlftls21 0
느낀점 : 지식인의 역할은 시대에 봉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완용의 올바르지 않은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의 추구로 역사속에 추락해 버린 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발견한 점 : 1.현실주의와 실용주의의 추구로 인한 비역사적 인간의 말로
2.명분, 대의, 정의의 추구가 중요